Ⅰ. 머리말
본 연구는 1908년부터 1945년까지의 시기에서 관기(官妓)의 문화변용 적응을 문화심리 학적 관점에서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조선시대 기생 중 관(官)에 소속된 ‘예인(藝 人)’으로서의 관기가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상황에서 겪은 변화를 고찰하고 이들이 어떻 게 사회적 역할과 정체성을 재구성하며 심리적 적응을 이루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908년은 조선의 전통적 사회 구조와 문화가 근대화와 식민지 지배라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특히, 관기제(官妓制)가 실질적으로 폐지되면서 (김영희 2006, 20) 관기는 국가의 보호와 전통적 역할을 상실하고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맞이했다. 관기는 단순한 기예 전문가가 아닌 국가와 밀접히 연결된 문화적 자산으로서 기능했으나, 1908년 9월 15일 그들의 소속이 매음부를 관리하는 경시청으로 바뀌어 예인 이 아닌 매음부로 혹은 그에 준하는 자로 격하되기 시작하였으며(『황성신문』 1908. 9. 15. 2면), 같은해 9월 25일 기생단속령과 창기단속령이 제정되어(『황성신문』 1908. 9. 30. 1면) 기생조합에 가입해야만 기업(妓業)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조선시대 국가 의례와 문화 행 사를 주도한 예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졌으나 관기제의 폐지와 더불어 일제강점기라는 새 로운 시대적 맥락 속에서 사회적 지위와 정체성, 전통적 위치는 무너졌다. 이러한 변화는 관기들의 예술적 정체성과 사회적 역할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생계를 유지하고 예술 적 정체성을 재구성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강요했다.
국내에서 관기제는 사라졌지만 일본 관광객에게 기생을 관기의 후예라고 홍보함으로써 관기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소비적 문화상품으로 이용되었다(신현규 2010, 70). 더 나아 가, 관기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점차 저급화되면서(박재희 2024, 185) 이들은 기존의 전통 적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새로운 형태의 적응과 변화를 요구받았다. 이처럼 혼 란한 상황 속에서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어떠한 선택을 했으며, 그 심리적 적응 상태는 어떠했을지에 대한 의문을 갖고 이 연구를 시작했다. 이들이 예인으로 활동하 며 관기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은 1910년대 초반 『조선미인보감』과 『예단일백 인』의 기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활동한 관기 후예들의 예인 활동은 기생 학교나 권번에서 학습 받고 활동하는 것 외에는 찾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이 와 같은 맥락에서 예인으로서 관기들이 겪은 변화는 단순한 역할 변화를 넘어선 문화적 변용의 사례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관기의 사례를 통해 예인에 대한 전통적 가치와 근대적 요구가 교차하는 지점을 이해하고자 한다.
기생에 관한 연구는 기존에도 다양한 관점에서 진행되어 왔다. 논의는 주로 기생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이동근 2013;이설희 2009;송방송 2003), 서화가, 여배우, 무용가, 음악가로서 각각의 예술 활동(김소연 2006;김영희 2006;백두산 2018;송미경 2008;오 진호 2010;이정노 2015;최열 2019), 그리고 일제강점기 사회 활동(박상석 2013;서지영 2005;이정민, 김영희 2021;황미연 2011) 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들은 대부분 역사적, 사회학적 접근에 국한되어 있으며, 관기라는 특수한 신분의 기생을 문화심 리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며 사회문화적·심리적 적응 과정을 심층적으로 분석한 사례는 찾 아보기 어렵다. 따라서 본 연구는 관기를 예술가로서 바라보며 그들의 사회문화적·심리적 문화변용의 적응 과정을 문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분석함으로써 기존 연구와의 차별성을 지 닌다.
그 시대의 신문과 잡지 등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 이들의 적응 양상을 문화심리학자 존 베리(John W. Berry)의 문화변용 이론(Berry, J. W. et al. 2006a, 2006b)을 바탕으로 동화, 분리, 통합, 주변화의 네 가지 범주로 나누어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관기의 전통 사회 에서의 문화적 변화에 적응 과정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현대 사회의 예술에서 문화적 접 촉 상황에서 나타나는 적응 양상을 비교·분석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Ⅱ. 문화심리학에 관하여
1. 문화심리학 이론
문화심리학(cultural psychology)은 문화적 전통과 사회적 관습이 인간의 정신과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는 학문으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존재하는 실존적 불확실성 즉,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근본적 욕구를 전제로 한다. 이 분야는 구성된 세계에 대한 의도적 인 개념(intentional conception)을 기본 가정으로 삼으며 인간이 자신이 세상을 인식하고 활용하는 데 필요한 의미와 자원을 사회문화적 환경으로부터 공급받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Richard A. Shweder 1997, 7). 즉,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사회문화적 환경에 의해 동기화 되며 이 환경은 단순히 외부 요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상호 의존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인간과 사회문화적 환경을 독립 변수와 종속 변수로 분리하 여 설명할 수 없으며, 오히려 두 요소가 서로를 구성하고 영향을 주고받는 복합적인 시스 템으로 이해된다. 결과적으로 문화심리학은 문화적 다양성과 개인의 정체성 형성 과정을 중시하며 다양한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의미를 창출하고 재구성하는지를 탐구한다(Richard A. Shweder 1997, 7). 이와 같은 이론은 문화변용 과정에서 개인과 집 단이 전통적 가치와 현대적 요구 사이에서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정체성을 재구성하는지에 대한 분석의 기반을 제공한다. 따라서 문화심리학의 관점은 관기의 문화변용 연구에서도 전통과 근대가 공존하는 사회문화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경험하는 심리적 변화와 정체성 의 재구성을 설명하는 데 핵심적인 틀로 활용될 수 있다.
그레이브스(Gravses, T. D. 1967)는 심리적 문화변용(psychological acculturation) 개념 을 도입하여 문화 간 접촉 상황에서 개인이 겪는 심리적 변화를 체계적으로 설명하였다. 이 개념에 따르면 개인은 외부 문화와 자신이 소속된 문화 양쪽의 영향을 동시에 받아 정 체성, 가치, 태도, 행동 등 여러 측면에서 변화가 발생하며 단순히 한쪽 문화를 흡수하거나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두 문화가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의미 체계를 형성하는 복합적인 과 정을 내포하고 있으며(337), 그렇기 때문에 문화변용 현상을 집단과 개인의 변화 양면에서 포괄적으로 검토하기 위해 문화적 수준과 심리적 수준 모두를 함께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 한다(Berry, J. W. 2020, 34). 즉, 사회 구조와 전통적인 문화 요소의 변화뿐만 아니라 개인 이 내면적으로 경험하는 심리적 갈등과 정체성 재구성이 모두 중요한 연구 대상임을 강조 한다. 그의 이론은 전통과 근대가 공존하고 변용되는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개인과 집단이 어떻게 적응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재구성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틀을 제공한다. 따라서 문화 간 접촉의 결과로 나타나는 변화 현상을 보다 심도 있게 분석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영향과 심리적 변화의 상호작용을 동시에 고려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존 베리는 문화변용에 대한 적응 과정을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첫 째, 사회문화적 적응은 긍정적 측면에서 개인이 일상적인 문화생활이나 문화 간 상호작용 속에서 자신의 역량을 개발하고 학습하며 성취를 이루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와 함께 사회 문화적 적응은 새로운 사회 환경에서 타인과의 연결을 통해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긍정적 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반면, 부정적 측면에서는 이러한 적응 실패가 사회적 또는 개인적 일탈행위나 제도적 참여의 결여 등으로 나타날 수 있다. 둘째, 심리적 적응은 문화변용 과 정에서 개인이 경험하는 스트레스와 관련된 심리적 변화를 측정하고 평가하는 개념이다. 이는 개인이 새로운 문화적 접촉으로 인한 심리적 압박을 어떻게 인지하고 조절하는지에 초점을 맞추며 문화적 변화가 개인의 내면 세계에 미치는 영향을 포괄적으로 설명한다 (Berry, J. W. 2006a, 43). 이러한 두 가지 적응 방식은 문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개인 이 자신이 속한 사회문화적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어떻게 의미를 재구성하고 정체성 을 형성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다.
2. 문화변용 분석방법
본 연구에서는 조선 후기에서 일제강점기로 전환되는 시기에 관기가 겪은 문화변용을 사례로 다룬다. 관기는 전통적인 예인으로서의 역할에서 벗어나 직업전환 및 사회활동 영 역의 확대를 경험하게 된다. 이들의 적응 과정을 분석하기 위해 개인과 문화 간의 상호작 용을 탐구하는 문화심리학의 관점을 채택하며 사회문화적 적응 및 심리적 적응 관점에서 고찰할 것이다. 사회문화적 적응은 관기들이 새로운 환경에서 생계를 유지하고 예술적 역 할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포함하며 심리적 적응은 이러한 변화 과정에서의 스트레스와 정 체성 재구축 과정을 다룬다.
또한 문화심리학자 존 베리의 문화적 적응 이론을 핵심 분석 틀로 사용할 것이다. 그는 문화적 접촉 상황에서 개인이나 집단이 네 가지 적응 방식(예: 동화, 분리, 통합, 주변화)을 통해 반응한다고 제시한다(Berry, J. W. 2020, 55-56). 동화(Assimilation)는 기존의 문화 적 정체성을 버리고 새로운 문화에 완전히 융합하는 방식이며, 분리(Separation)는 기존 문화 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문화와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방식을 말한다. 통합(Integration)은 기존 문화와 새로운 문화를 모두 수용하며 조화를 이루는 방식이고, 주변화(Marginalization)는 기존 문화와 새로운 문화 모두에서 소외되는 방식을 뜻한다. 이 내용을 표로 정리하면 다 음과 같다.
표 1
존 베리의 문화적응방식(John W. Berry's Cultural Adaptation Method)
동화(Assimilation) | 기존의 문화적 정체성을 버리고 새로운 문화에 완전히 융합하는 방식 |
분리(Separation) | 기존 문화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문화와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방식 |
통합(Integration) | 기존 문화와 새로운 문화를 모두 수용하며 조화를 이루는 방식 |
주변화(Marginalization) | 기존 문화와 새로운 문화 모두에서 소외되는 방식 |
관기는 급격한 문화적·사회적 변화 속에서 다양한 적응 전략을 선택하며 그 결과 사회 적·심리적 영향이 나타난다. 따라서 본 연구는 관기가 더 이상 전통적인 ‘관’의 소속으로서 가 아니라 독립된 개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어떠한 사회문화적 및 심리적 문화 변용을 경험했는지를 심도 있게 살펴보고자 한다.
Ⅲ. 관기의 사회문화적 문화변용
관기의 사회문화적 문화변용은 근대화와 식민지 시대라는 역사적 변환 속에서 그들의 전통적 역할과 정체성을 변화시키며 나타났다. 관기제 폐지와 함께 급격하게 변화한 사회 문화와 환경에 의해 직업에 대한 생각의 전환을 가져오고 사회활동의 영역이 확대되고 발 전되었다. 관기의 전통적 기능은 국가 행사와 의례를 지원하는 데 국한되었으나 근대화 과정에서 이들의 역할은 다양화되었다. 이들이 변화하고 적응하는 모습을 살펴보면 다음 과 같다.
1. 교육화와 전문화
관기제의 폐지로 관기는 사라지고 관기의 후예로, 예인으로서 살아가는데 기생학교는 전통 기예를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기관으로 설립되어 기생들의 예술성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생학교와 기생조합은 이후 일본식인 권번으로 바뀌는데 기생학교 와 권번 출신 기생들은 춤과 노래뿐 아니라 시, 서화, 서양음악을 배우며 근대적 교육을 통해 전문적인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했다. 사실 이전의 관기는 의녀(醫女)를 하다가 상방(尙方)을 하다가 예인의 일을 병행했어야 했다. 기생학교와 권번에서 교육을 통해 예 술가로서 독립하여 예인이라는 전문적인 직업군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다음의 사례들을 통해 기생이 사회문화적으로 적응하여 직업적으로 전문화되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간판은 학교, 내용은 권번
가무, 가곡 연습하는 홍군들
산 찾고 물 찾아서 고생
조선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이 기생학교는 멀리서도 누구나 한 번 보고저 하거든 하물며 평양까지 와서 아니 볼 수 있으랴. 다시 얻기 어려운 이 기회에 기생학교를 보고자 갔다. 이름이 학교지 기성권번(箕城券番) 안에 있는 기생의 복습장을 학교라고 부를 뿐이다. 앞문으 로 들어서면 넓은 방이 있는데 이것이 무도연습장이다. 그 좌우로 사무실이니 기숙사가 있다. 우리가 갔을 때에는 뒤뜰에 멍석을 펴고 수십 명 기생이 무도 연습에 정신이 없었다. ◇ 뜰이라야 열 평밖에 안 되는데 이 뜰로 큰 기생 작은 기생이 한 데 어울려 뛰고 있다. 여러 생도(새끼 기생)들은 빙 둘러서서 구경한다. 춘광이 찬란한 중에 오색이 영롱한 광경이란 말할 수 없는 장관이었다. 학교에서는 우리 일행을 위하여 그 중에도 우수한 생도 삼사명을 골라 금무와 승무를 추게 하였다. ◇ 금무는 노산홍(盧山紅), 변련선(邊蓮仙), 김취산(金翠山) 등이요, 승무는 변련선이가 추었는데 모두 일류로 명성이 높은 만치 어여쁘고 얌전하게 추었 다. 추는 동안에 이마에서 흐르는 땀까지도 향기가 나는 듯하였다. ◇ 이 학교는 대정원년에 시작한 것인데 생도가 해마다 늘어 지금은 일백오십명의 생도가 있고 일백칠십구명의 기생이 있다 한다. 기생 중에서 미인으로 쉴 새 없이 불리기는 모란대(牡丹台) 왔던 네 명은 물론이오 그 외에 김영월(金暎月)이 같은 미인은 가장 대표적으로 인기를 가지고 있다 한다. 생도 즉, 새끼 기생 중에는 전도유망한 애가 많은데 그 중에도 김승희(金勝熙)(16) 같은 어린 기생은 매우 어여쁘고 똑똑하다(『매일신보』 1927. 4. 24. 5면).
이 기사는 1927년 4월 24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것으로 기생들이 전문적인 교육과정과 수련을 통해 전문적인 예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교육은 기생의 사회적 가치를 재조명한다.
기생 양성소
종로권번에서 출원
국제도시로 약진을 거듭하고 있는 대경성의 문화는 해를 따라 발전되고 있는 중이므로 외국인의 관광단도 연낙부절이 되고 있다. 이에 따라 그들을 「서비스」하는 기생들도 교양 있는 사람이 앞으로는 필요하게 되었고 또 기예와 지조를 갖추지 아니한 기생은 경찰 당국으 로서도 장차는 허가를 아니 하게 될 터이므로 금번에 경성에도 모던 기생학교가 출현하게 되었다. 그 학교는 부내락원정에 있는 종로권번에서 23일 종로서를 경유하야 경기도로 기생 양성소의 설치신청을 제출하였는데 그 내용인즉 만 14세 이상 20세 이하로 보통학교를 졸업 한 정도의 여자로서 인정시험을 보아 입학을 허가할 터이라는 바 보통과는 3년 본과 1년 전수과 1년 등 세 가지 구별이 있으며, 과목은 국어 조선어 산술 등 외에 기생으로서 알아야 될 가사 춤 기타 여러 가지라고 한다(『매일신보』 1937. 6. 25. 6면).
위 기사는 기생 학교와 기생 양성소에서 기생이 되기 위해 춤과 국어, 조선어, 산술 등 기생이 알아야 할 전문적인 교육을 받는 것을 기사화하며 기생이 전문적인 직업군이 된 것을 전달해 준다. 기생 양성소는 그동안의 습악(習樂)에서 본격적으로 직업인을 키워내는 것으로 기생이 전문적인 직업으로의 변화와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권번 탄생
모시기생들에 낭보
목단강에는 아직까지 권번이 조직되지 못하여 요리업자들이 기생을 고입하는 형식으로 되어있었고 혹시 시간대를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영업주를 본위로 한 것이 었는데 금번 목단강 갑종 요리업자들의 타협으로 권번이 조직되었는데 현재 약 50 명의 기생이 권번 시험 에 합격하였다고 하며 시간대는 첫 시간을 2원으로 하고 그 다음 시부터 1원 50전인바 시간대 의 수입을 가지고도 기생이 7할 요리점에서 1할 권번에서 2할을 분배한다고 하며 사무소는 서장안가에 두고 조합장으로는 백기영 씨가 취임하였는데 권번의 명칭은 목단강 조선권번이 라고 하였다한다. 특히 기생들의 친목을 토하기 위하여 매월 1회 좌담회를 개최하리라고 한다 (『만선일보』 1940. 3. 11. 3면).
1940년 목단강 조선권번이 생겼으며 기생이 되기 위해 권번 시험을 봄으로써 기생은 특정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될 수 있는 전문직업이었다. 또한 수입에 대한 내용을 통해 경제적 이윤을 창출하는 직업군이었다. 조합장 취임과 기생들의 친목을 위한 좌담회를 개 최하는 것을 통해 기생의 직업 환경을 관리하고 보호하는 제도가 존재하는 점에서 확실히 기생이 전문적인 직업이라는 인식을 갖게 해주는 기사다. 기생학교와 권번의 교육은 춤과 노래를 전문적인 공연 예술로 발전시켰으며 춤, 노래, 서양음악, 한문 교육을 통해 기생의 전문성을 강화했다. 이와 같이 기생학교와 권번에서 기생들은 근대적 교육을 받아 예술적 전문성을 확보하며 전문적인 직업인으로 성장했다.
2. 모델과 배우로의 전환
일부 관기는 신문과 잡지의 광고 모델이나 연극배우로 변신하며 대중문화와 연결된 새 로운 직업군을 개척했다. 이는 단순히 생계를 위한 선택을 넘어 예술가로서의 사회적 위치 를 재정립하려는 전략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음 <도판 1>은 기생이 모델로서 활동한 사례이다.
<도판 1>에서 평양기생 김옥란이 은단광고를 찍은 포스터로 광고 모델로 활동한 자료이 며, 이당 김은호는 평양기생 김옥진을 모델로 「미인도」를 그려 기생이 그림 모델로 활동한 자료이다. 기생 엽서는 일본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조선 문화를 홍보하는 수단으로 활용되 었는데 ‘조선풍속’이라는 제목으로 제작되어 일본인의 관심을 끌었다. 관광 안내 책자에도 실어 조선을 기생의 나라로 묘사하였다. 이 자료들을 통해 기생에서 모델로 직업을 전환하 는 기생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다음은 영화배우로 활동한 기생에 관한 기사다.
영화배우?
『강향란』
기생에서 배우까지 전 6막
각금각금 심심하면 이야기꺼리를 작만해 주든 강석자(姜錫子, 28) 엣날 기명으로 강향란은 영화 여배우로 지금 촬영 중에 있는 정기탁 뎨공 이경손 감독 신영화 <봉황의 면류관>에 박래품 아주머니 역을 맡아서 출연 중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가 이때까지 세상의 이야기꺼리를 작만해 놓은 프로그램 중 중요한 것만을 추려 요령만 따놓으면 이러한다고 한다(『동아일보』 1926. 10. 8. 5면).
기사에서는 강향란(1900-?)이 “기생에서 배우까지”라는 표현으로 소개되며 직업적 전 환의 과정을 보여준다. 2025년 2월 10일 네이버지식백과의 웹사이트에 의하면 강향란은 14세에 기적을 올린 한남권번 출신으로 기생 출신 여성이 공연 경험을 바탕으로 영화계에 진출한 사례를 보여주며 경제적 동기가 배우 활동의 중요한 요소였음을 시사한다. 강향란 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기생이 영화배우로 활동하게 된 사례다.
다음 사례는 기생 잡지 『장한』의 기사에 실린 내용이다.
아담한 맵시와 천진란만한 애교로써 일시 全京城의 人氣를 一身에 모흐던 朝鮮券番의 석정희 (石貞嬉)는 그후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新劇運動團體인 土月會에 드러가게 되어서 석금성(石金 星)이라는 일흠으로 「갓난이의 설음」「스산나」「카추샤」等에 出演하야 만도 애극가의 눈물을 자아내더니, 엇지한 닭인지 작년 7월 이후에 다시금 消息이 묘연하게 되었다(『장한』 1927, 30).
『장한』에 「무선전화」라는 제목의 글에 조선권번의 기생 석정희가 신극운동단체인 토월회 에 석금성(1907-1995)이란 이름으로 배우가 되어 「갓난이의 설음」, 「스산나」, 「카추샤」 등에 출연해 많은 관객의 눈물을 자아냈다는 내용이다. 석금성은 조선권번에서 인기를 한 몸에 받은 기생이었지만 영화배우로 직업전환을 해서 성공한 배우이다. 1990년대 초까지도 영화와 드라마에서 활약한 자료들이 남아있다. 기생에서 모델로 혹은 영화배우로 활동한 이들의 사례를 통해 모델과 영화배우로 직업전환에 성공한 기생이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
3. 가수로의 진출
대중음악이 활성화되면서 전통적 소리꾼이던 기생 들은 현대적 음악 장르에 도전하며 대중성과 전통성 을 조화시키려 했다. 이는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창 조적 혁신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예컨대 평양은 ‘가 수의 도시’로 불릴 만큼 기생 출신 가수들이 활발히 활동한 곳이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민요가수 왕수복 이 있다. 그는 12세에 평양 기성권번의 기생학교에 입학해 3년간 수학한 후 1932년 기성권번 사진집에 이름을 올렸다. 졸업 후에는 레코드 가수로 데뷔했으 며 콜롬비아 레코드를 거쳐 포리돌 레코드로 소속을 변경하면서 ‘유행가의 여왕’으로 떠올랐다(신현규 2010, 55). 이처럼 기생 출신 예술가들은 전통적 기반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음악적 흐름을 수용하며 대중음악 발전에 기여했다. 기성권번 출신의 선우일선은 1935년 3월 28일 JODK 라 디오에 출연하여 일본 전역에 중계방송되었다. 그는 방송에 서 6곡을 불렀으며 이후 포리돌 레코드에서 다수의 곡을 히 트시켜 포리돌을 ‘민요의 왕국’이라 불리게 할 만큼 큰 인기 를 얻었다(신현규 2010, 194). 또한 1935년 잡지 『삼천리』 에서 발표한 10대 가수 순위에서 5명의 여성 가수 중 1위 왕수복, 2위 선우일선, 5위 김복희가 차지했다. 이들은 모두 기생 출신으로 이를 통해 기생이 당대 대중문화를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기성권번 소속 기생이었던 한정옥도 가수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오케 재즈오케스트라의 반주로 ‘꿈길’·‘마음의 봄’·‘보내는 선물’·‘설움을 잊으려고’ 등 10여 곡의 유행가를 취입했다. 또한 1939년 11월 잡지 『모던일본』의 조선특집호인 『일본잡지 모던: 일본과 조 선 1939년』에 실린 「평양기생 좌담회」에 당대의 명기들과 함께 참석(송방송·송혜원 2001) 하며 주목받았다.
<도판 4>은 콜럼비아 음반에 취입한 기생들의 명단과 취입 곡목을, <도판 5>는 오케 음반에 취입한 기생들의 명단과 취입 곡목을 정리한 것이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8, 220).
<도판 4>에 나열된 인물들은 기생 출신으로 전통적인 예술 활동을 하다가 음반 취입을 통해 가수로 활동 영역을 확장했다. 김갑자·문명옥·왕수복 등 여러 명이 콜럼비아 레코드에 서 음반을 녹음한 것으로 보아 이들은 단순한 기생이 아닌 전문 가수로서 대중음악 시장에 진입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각 기생들이 녹음한 곡들을 보면 민요, 창가, 신민요, 유행가 등의 장르에서 활약했으며 이는 기생들이 전통 음악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점차 현대적 대 중가요로 변모해갔음을 보여준다. 신민요와 유행가를 취입한 사례는 기생 출신 가수들이 당시 음악 트렌드를 반영하여 대중음악을 주도하는 역할을 했음을 시사한다.
<도판 5>에 나열된 인물들 또한 기생이었으나 오케 음반사를 통해 녹음을 진행하며 가 수로 활동을 확장했다. 김옥엽, 김추월, 설중매 등의 이름이 여러 음반사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단순한 기생이 아닌 전문적인 가수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기생들이 전통 예술을 기반으로 활동하다가 대중가요의 확산과 함께 본격적으 로 가수로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취입 장르에 신민요와 유행가를 취입한 사례가 많다는 점은 기생 출신 가수들이 기존의 전통 음악에서 벗어나 현대적 감각을 가미한 대중가요로 활동을 확장한 증거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도판 4>와 <도판 5>를 통해 기생들이 단순한 전통 예술인의 역할을 넘어 음반 취입을 하고 가수로 발전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내용을 통해 민요에서 유행가로의 변 화는 기생 출신 가수들이 시대의 흐름에 맞춰 창조적으로 혁신하며 대중음악의 중요한 주 체로 자리 잡았음을 시사한다. 이들의 성공은 당시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 확대와 지위 향 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음반 산업의 성장과 대중음악의 보급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 등 해외에서의 활동을 통해 한국 음악과 문화를 해외에 알리는데 기여하였으며 더 나아가 문화 교류의 초석이 되어 한국 사회의 문화적, 사회적 발전에도 다각도로 긍정 적인 영향을 주었다.
4. 서화가로 활동
1910년부터 1920년대에 걸쳐 기생학교에서 서화를 배운 기생들은 전문 서화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들의 기량을 크게 향상시켰다. 이들은 주산월, 김능해, 김월희, 림기화, 함인숙, 신능파, 오귀숙 등으로 대표되며 윤영기, 김유탁, 양영진 등의 유명 서화가에게 교 육받았다. 이와 함께 이들은 ‘취호회(揮毫會)’를 열어 작품을 발표하고 언론의 주목을 받으 며 자신들의 예술세계를 확립해 나갔다. 특히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옥경 윤영기, 해강 김규진, 소석 양영진, 수암 김유탁 등은 기생 서화가들이 예술계에 배출되는 데 뚜렷 한 영향을 미쳤다(김소연 2006, 179;김취정 2014, 297). 이들의 활동은 단순히 전통 예술 의 계승을 넘어 기생 출신 예술인들이 전문 서화 가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1910년대 서화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기생 중 하나로 꼽히는 금주(錦珠) 김능해(金綾海)는 대 정권번 소속으로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 한 「국란」 작품을 통해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였 으며 신문 기사에서는 그녀가 사군자, 송학, 노 안 등 다양한 주제를 뛰어난 글씨와 함께 그려내 며 이전 조선공진회 및 기타 미술전람회에 꾸준 히 출품해 온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매일신보』 1922. 5. 24. 3면).
또한 오귀숙 역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하 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24년부터 1926년까 지 묵란화(墨蘭畵)로 여러 차례 입선하며 대중에 게 이름을 알렸고, 1927년에는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에서 서화에 능한 명기로 유일하 게 소개되기도 했다(이능화 1992, 263). 이러한 오귀숙의 성공은 당시 기생 서화가들의 활발한 활동과 그들의 예술적 잠재력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조선미인보감』에 수록된 34 명의 기생 화가 중 평양 출신이자 한성권번 소속인 신능파가 언론에 소개된 바 있다(김소 연 2006, 194),
이처럼 기생들은 기생학교에서 서화 교육을 받고 전문 서화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단순 한 전통 예술인의 경계를 넘어 전문 서화가로 성장해 나갔다. 김능해와 오귀숙 같은 인물 들은 다양한 전시회에서 작품을 선보이며 자신들의 예술세계를 확고히 했고 평양 지역의 서화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사례들은 기생들이 전통 예술의 계승과 발전에 기여한 동시에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기생 출신 화가들이 서화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사실을 고려하면 이들의 예술적 역량 이 단순한 유희를 넘어 전통과 창작의 영역으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기생들의 서화전에 관한 기사다.
기생 작품 서화전
평양공회당에서 개최
평양 기성권번에서는 작년 이래 화단(畫壇)의 명성(名星)인 수암김유탁화백(守巖金有鐸畵 伯)을 초빙하여 동 권번에서 양성하는 예기들에게 기생으로서 가히 없어서는 안 될 한 가지의 기능인 서화(書畫)를 학습하게 하는 중인데, 불원간(不遠間)에 개최될 박람회를 앞두고 어여 쁜 어린 기생들의 귀여운 재주를 일반인에게 소개하기 위하여 21일 ·22일 양일간 오전 10기 부터 오후 4시까지 평양공회당에서 서화전람회(書畵展覽會)를 개최하였는데...(『매일신보』 1929. 8. 22. 3면).
기사에서처럼 기생 작품 서화전도 열었다. 평양 기성권번 주관하에 평양공회당에서 열 린 기생 작품 서화전을 소개하면서 기생들이 서화 교육과 연습을 통해 예술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음을 알리고 다가오는 박람회를 대비하여 기생들의 예술적 재능을 대중에게 선보이고자 한 조직적인 노력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한편, 기생 출신 화가 남전(藍田) 허산옥(許山玉1924-1993)은 여성 수묵채색화가로서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한 인물이다. 전주문화재단에 의하면 그녀는 1940년 남원권번에 입소한 후 1943년 전주권번에서 기생으로 활동하였으며 주로 사군자에 목련, 파조, 포도를 결합한 팔군자도와 작은 크기의 산새가 있는 화조도를 그렸는데 이들 작품은 색채의 감각 적 표현과 일상적 소재의 다양한 미적 감각을 담아내어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2024년에 개최된 허산옥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통해 그 업적과 예술적 영향력을 재조명받으며 현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조상인, 2024. 11. 10).
위의 사례들을 통해 그녀들의 삶은 단순한 개인적인 성공을 넘어 여성 예술가의 독립성과 사회적 영향력을 보여주었으며 기생 문화와 미술을 연결하여 독창적인 미적 가치를 창출했다. 또한 자신만의 예술적 정체성을 구축하고 사회적 역할을 확장하는데 중요한 귀감을 제 공한다.
5. 사회운동과 독립운동 참여
기생 신분으로 사회운동과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례는 관기의 예술적 변용과 사회적 역할 확대를 잘 보여준다.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공연 활동이나 여성 권리 신장을 위한 단체 결성을 통해 이들은 단 순한 예술인을 넘어 사회적 변화를 주도하는 주체로 거듭났다. 다음은 이들의 사례이다.
토산장려와 마산기생의 동맹
음력 정월 일일부터 조선 것만 쓰기로 동맹
마산부남선권번(馬山府南鮮券番)에서는 거월삼십일일 하오이시에 권번총회를 열고 사십 여명 기생이 동명결의 하기를 우리도 조선사람의 일분자가 되엿스니, 조선물산을 쓰고먹고 입어야 될터이며 우리는 돈업는 사람이라 천한기생의 생활을 하게 되엿스니 장래를 위하야 검소하여야 하겟다는 자각아래에서 지금부터는 조선물산 으로만 검소하게 의복을 하여 입자 는 동맹을 하엿다는대 만일 이후로 조선물산외에 다른 것으로 의복을 지어입는 자가잇는 동시에는 위측금 일원씩 증수하야 저축하엿다가 빈한한 사람 구제하는 사업에 쓰게 하기로 결의한바 음력정월일일부터 일반기생이 본목치마와 명주저고리를입고 조선토산인 자주당긔 를 드리기로 결의하엿다더라(『동아일보』 1923. 2. 5. 3면).
평양기생토산복
평양에잇는 긔성권번(箕城券番)이라는 기생조합에서도 음력 정월 초하루날부터 조선물산 으로 의복을 지어 입게한 바 일제히 수목 치마에 명주저고리들을 입엇더라(『동아일보』 1923. 2. 20. 3면).
단연과 토산애용 전주기생도맹약
전주권번(全州券番) 오십여명 기생중 일부분은 작년가을부터 단연을 하는 동시에 비단등속 을 도모지 사지 아니하고 조선물산을 쓰기로 실행하여 오든바 요사이에 이것을 텰저히 실행하자 하야 서약서(誓約書)를 바다 실행단톄를 조직중 이라는대 이에 찬성하야 발긔인된 자가 십이명 이요 지금취지서와 규측서를 긔초 중이라더라(전주)(『동아일보』 1923. 2. 20. 3면).
앞의 세 기사는 1923년 2월 『동아일보』에 실린 보도로 각 지역의 기생들이 토산 장려와 단결을 위해 자발적인 동맹과 서약을 체결한 과정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당시 기생들이 단순한 예술인이나 오락 종사자를 넘어 민족경제와 문화적 자립, 그리고 민족 정체성 강화 에 기여하려는 움직임에 동참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기생들이 단순히 전통 예술과 오 락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민족 정체성 회복과 경제적 자립, 그리고 민족문화 보존을 위 한 사회운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자신들의 사회적 역할을 재정립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기생들이 과거의 한계를 넘어 민족 사회에서 주체적이고 조직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사회운동가로 발전해 나간 중요한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기생들이 빈민 구제금 각출
누차 보도한 평양 부내 극빈자 200명에 대하여는 그 후 물밀 듯이 동정이 모여드는 현상으 로 부내 250여 명의 기생들도 이들 빈민을 위하여 애틋한 동정을 던지겠다 하여 벌써부터 그 동정을 자기네 사이에서 모집 중인데, 이미 모집된 것만도 백 수십 원으로 구세말까지에는 적어도 천 원은 모이리라는바 세상에서 조소를 받는 몸으로 밤을 세우 가며 웃음과 노래를 팔아 받은 돈을 이같이 아낌없이 내어던지는 행위는 세인에게 혹종의 자극을 주리라 한다(『조 선중앙일보』 1934. 1. 1. 12면).
이 기사는 1934년 1월 1일자 『조선중앙일보』에 실린 내용으로 기생들이 평양의 극빈자 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구제금을 모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기생들이 과거에 사회적으로 비하 받는 대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빈민을 돕기 위해 자기들의 돈을 모아서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선사했다는 점이다.
야명권번 기생 수재 의연 연주회
수익금 640원 50전
삼포 수해 난재민을 돕기 위하여 고려 청년회 주최와 부내 각 신문 지국 후원으로 야명권번 기생이 출연하여 수재 의연 연주회를 개최한다…중략…양일간 입장수가 210명이 되고, 의연 금이 430원, 합계 640원 50전이라고 한다(『매일신보』 1934. 8. 8. 5면).
이 기사는 1934년 8월 9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내용으로 야명권번의 기생들이 삼포 지역의 수해 난민들을 돕기 위해 주최한 수재 의연 연주회에 관한 것이다. 기생들이 사회 적 기여를 하는 모습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으며 이를 통해 당시 기생들의 사회적 역할과 기부 활동을 보여준다. 그들의 기부 활동은 기생이라는 직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 사건은 단순히 기부에 그치지 않고 기생들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다하려는 의지와 행동을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다음은 독립운동 활동을 한 사례이다.
기셩들이 만세
1919년 3월 29일 오전 10시 30분경, 수원조합 소속 기생 일동은 자헤의원으로 검사를 받으러 가던 중, 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물녀병원 안으로 들어가 뜰앞에서 계속해서 만세를 부르다가 병원에서 쫓겨나 경찰서 앞으로 나왔다가 해산되었다. 조합 취제 김향화(金 香花)는 경찰서에서 취조하는 중이다(『매일신보』 1919. 3. 31. 3면).
이 기사는 1919년 3월 29일경에 있었던 사건을 보도한 것으로 당시 기생들이 독립운동 에 참여한 구체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기사를 통해 당시 기생들이 조직적인 단결을 바탕으 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경찰의 제압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만세를 외치며 독립 의지를 표출했고 이 과정에서 김향화가 체포되는 등 실제적인 희생을 감수하였다. 이는 기생들이 기존의 사회적 편견을 넘어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나선 사회운동 주체로 변화하고 있었다는 중요한 증거로 해석된다.
2025년 2월 15일 위키백과에 따르면, 한남권번 출신인 정칠성(丁七星, 1897-1958)은 기생으로서의 삶을 넘어 사회운동과 여성운동의 주체로 활동한 인물이다. 1919년 3·1 만 세운동을 계기로 민족운동에 뛰어들었으며 이후 적극적인 사회운동과 여성주의 운동에 참 여하였다. 1927년에는 신간회와 근우회 창립에 참여하여 여성 계몽 강연을 펼치고, 신문과 잡지에 칼럼과 논설을 발표하며 사 회적 의식을 고취하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1929년 광주학생운 동에 적극 가담하여 학생들의 항일 투쟁을 지원하였다. 1930년 에는 제2차 경성학생시위사건(일명 근우회사건)의 주동 혐의로 투옥되었으며 이 사건을 통해 그녀가 단순한 문화예술인이 아 닌 민족 해방운동의 주체로서 활동하였음이 분명해졌다. 정칠 성의 삶은 단순한 예술적 활동을 넘어 기생이 민족 해방 운동 의 주체로 활동하였으며 기생의 활동이 사회적, 정치적 기여로 확장된 경우다. 그녀는 정치·사회적 운동에 참여하여 역사적 변 화를 이끌어낸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이처럼 기생은 예술가로서 갖춘 공연 기획 능력과 예술적 재능을 활용해 민족적 메시지 를 전달하며 사회운동과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기생 출신이라는 배경을 예술과 정치적 저 항의 도구로 활용하여 단순한 예술인을 넘어 민족 해방 운동의 주체로 활동하였다. 그들의 활동은 당시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민족의식 고취와 사회 변혁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이러한 활동은 기생들이 사회운동의 주체로서 인정받고 이후 여성들의 사회 참여와 권리 신장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사료된다.
Ⅳ. 심리적 적응 분석
문화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속한 사회문화적 환경에서 의미와 자원을 획득하며 살아가도록 동기화되어 있다. 즉, 인간의 정체성과 심리적 경험은 그들이 살아가는 의도적인 세계인 사회문화적 전통과 관습, 그리고 그것들이 제공하는 의 미 체계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기생들이 겪은 문화적 적응 과정을 존 베리의 네 가지 적응 방식(동화, 분리, 통합, 주변화)으로 분석하면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1. 동화
동화는 기존의 문화적 정체성을 버리고 새로운 문화에 완전히 융합하는 방식이다. 문화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과정을 사회문화적 환경이 개인에게 새로운 의미와 자원을 제공하고 그에 따라 개인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재정의하는 ‘의도적 재구성’의 한 형태로 이해한다. 이 과정에서 일부 관기들은 전통적 정체성을 버리고 근대적 예술 활동에 완전히 융합하여 새로운 문화적 위치를 확보하는 경우가 많았다. 모델, 배우, 가수, 서화가 등으로 성공한 기생들의 사례는 이러한 동화 전략의 대표적인 결과로 볼 수 있다.
모델로의 전환은 평양 명기 김옥란이 은단광고의 포스터 모델로 활동한 사례가 있었으 며, 김은호의 <미인도>에서 평양기생 김옥진이 화가의 그림 모델로 활동한 사례가 있다. 이는 전통 예술인으로서의 정체성 대신에 근대적 시각과 미적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역 할을 수용한 전형적 동화 사례다. 영화배우로의 전환에서는 한남권번 출신인 강향란은 전 통적 정체성을 넘어서 영화배우로 직업을 전환하였다. 그녀는 기생이라는 문화적 배경을 뒤로하고 근대적 예술 활동인 영화배우라는 새로운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었다. 강향란의 전환은 기생들이 전통을 넘어 근대적 예술 활동에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새로 운 문화적 위치를 확보한 중요한 예시가 된다.
가수로의 전환은 1916년 평양 출신으로 음악을 전공하기 위해 동경으로 유학을 떠난 다동기생조합의 김명옥과 기성권번의 기생 학교에 입학 후 졸업하여 레코드 가수로 데뷔 한 왕수복 등은 각각 동화의 사례를 보여준다. 왕수복은 콜롬비아에서 포리돌 레코드로 소속을 바꾸며 ‘유행가의 여왕’으로 등장했다. 기생에서 가수로의 전환은 새로운 문화적 요구와 대중문화의 변화에 적응하여 성공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서화가로의 전환은 서화가 로서의 성공을 거둔 오귀숙과 허산옥이 있다. 전통적인 서화기예를 바탕으로 근대적인 표 현 기법을 습득하여 한국 미술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자리 잡았다. 그들은 전통적인 기생의 예술적 기술에서 벗어나 근대적 서화기법을 받아들여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한 인물들이다. 그들의 성공은 전통적 가치에서 벗어나 근대적 문화를 수용한 대표적인 예로 기생 출신 예술인들이 어떻게 변화하는 사회적 요구에 적응했는지를 보여준다.
이와 같이 기생들은 모델, 영화배우, 가수, 서화가로서도 성공을 거두었고 이는 전통적 기예에서 벗어나 근대적 예술 형식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동화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기생들은 전통적인 ‘예인’으로서의 정체성 대신 근대 예술가로서 자신을 재정의하며 사회문화적 환경에서 새롭게 제공되는 자원(예술 교육, 제도적 지원, 대중의 관심 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이는 문화심리학에서 말하는 ‘의도적인 세계’ 내에서 개인이 의미를 재구성하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분석할 수 있다. 기생들이 전통과 근대 사이 에서 새로운 예술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모습은 그들의 심리적 적응을 잘 보여준다. 동화 과정을 통해 관기는 전통적 의미 체계 대신 근대 사회에서 요구하는 예술적 역할과 정체성 을 받아들이며 자아를 재구성하였다. 이는 개인이 새로운 사회문화적 환경에 효과적으로 적응하고 변화하는 가치 체계 속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내는 능력을 보여준다.
2. 분리
분리는 기존 문화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문화와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문화심리 학에서는 기존의 의미 체계와 가치관을 보호하려는 방어적 적응 전략으로 이해된다. 기생 들은 전통적 정체성을 고수하며 근대적 변화와 사회적 요구에 적응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나타낸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예술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민족의 자주성을 주장하며 사회운동과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사회적 역할을 확장했다. 이를 통해 기생 들은 단순한 예술인에서 벗어나 사회적 변화를 주도하는 주체로 변화하였다. 기생들의 사 회운동과 독립운동 참여는 예술 활동을 넘어서 일제강점기 동안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 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들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공연을 개최하거나 여성 권리 신장 을 위한 단체를 결성하는 등 민족적 자각을 바탕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기존의 사회적 제약을 넘어 사회적 변화를 위한 중요한 주체로 떠올랐다.
1923년 마산부남권번의 40여 명의 기생은 ‘조선사람의 일분자가 되자’는 자각을 바탕으 로 자발적으로 조선물산을 사용하고 검소한 삶을 살기로 결의하고 기생들이 민족의 자주 성을 강조하며 조선 토산품 사용, 검소한 삶, 토산 장려 운동과 같은 사회경제적 운동에 참여한 사례는 전통적 가치와 민족 정체성을 고수하려는 분리 전략의 한 형태이다. 1934년 에는 평양 부내 극빈자들을 위한 기생들의 자발적인 구제금 모금 활동이 있었다. 기생들은 자신들이 벌어들인 돈으로 빈민을 돕기 위해 동정을 모았고 이를 통해 기생들이 단순히 사회적 낙인에 갇혀 있는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주체임을 입증했다. 이 활동은 기생들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였다. 1934년 야명권번 기생들의 수재 의연 연주회는 기생들이 삼포 지역의 수해 난민 을 돕기 위해 수재 의연 연주회를 개최하였다. 이를 통해 기생들은 사회적 기여를 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그들의 활동은 사회적 인식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공연을 통해 얻은 수익을 사회적 목적을 위해 사용하며 예술을 통한 사회적 책임감을 적극 적으로 실천하였다.
또한 정칠성의 독립운동 활동은 기생이 단순히 예술의 영역을 넘어서, 민족적 해방과 사회적 변화를 주도하는 인물로서의 역할을 확립한 사례이다. 1919년 만세운동과 정칠성 의 민족해방, 여성운동 참여 등은 기생들이 전통적 역할에 머무르면서도, 그 정체성을 바 탕으로 사회적, 정치적 변화에 저항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분리 전략은 기생들이 전 통적 의미 체계를 보호하려는 동시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민족적 자긍심과 사회적 책임감 으로 확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개인이 기존의 가치와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사회적 맥락에서 독자적인 역할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심리적 긴장과 방어적 태도를 반 영한다.
분리 전략을 통해 기생들은 전통적인 예술과 문화적 정체성을 고수하면서 사회적 요구 에 반응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했으나 그들은 예술을 넘어 사회운동과 독립운동의 중요 한 주체로 변모하였다. 기생들의 참여는 단순한 문화적 자아실현을 넘어 민족경제의 자립 과 민족문화의 보존을 위한 운동으로 확장되었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권리 신장에도 긍 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예술과 사회적 변화를 결합하여 자신들의 역할을 재정의하 며 분리라는 심리적 변용에 속하며 민족해방과 사회 변화의 중요한 동력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문화심리학에서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보호하기 위해 방어적 태도를 취하는 것으 로 설명된다.
3. 통합
통합은 기존 문화와 새로운 문화를 모두 수용하며 조화를 이루는 방식이다. 문화심리학 에서는 개인이 전통적 정체성과 현대적 요구를 융합하여 양쪽의 가치를 모두 내면화하고 새로운 의미 체계를 창출하는 과정으로 융합적응으로 이해된다. 기생학교와 권번에서 활 동한 기생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전통춤과 노래를 현대적 형식으로 재구성하며 예술 성을 발전시켜 나갔다. 기생학교와 권번은 단순한 기예(技藝) 전수의 공간을 넘어 기생들 의 전문성을 체계적으로 육성하는 기관으로 기능하며 기생들이 전문 예술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했다. 기존의 기생조합과 기생학교가 일본식 권번으로 바뀌면서 이 곳 출신 기생들은 춤과 노래뿐만 아니라 시, 서화, 서양음악 등을 배우며 보다 근대적인 교육을 받았다. 이를 통해 기생들은 전문적인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할 수 있었다.
과거의 관기는 예능 활동만을 주업으로 삼지 못하고 의녀나 상방의 등의 역할을 병행해 야 했다. 그러나 관기제의 폐지로 인해 신분이 변하고 기생학교와 권번에서의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기생들은 예술가로서 독립적인 직업군을 형성할 수 있었고 공연과 예술 활동 을 통해 경제적 수익을 창출하는 전문적인 직업인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기생학교에서는 기생들이 춤과 가무, 가곡뿐만 아니라 국어, 조선어, 산술 등의 체계적 인 교육을 받으며 예술인으로서의 소양을 쌓았다. 1927년의 기록에 따르면 평양 기생학교 에서는 무도연습장에서 수십 명의 기생이 춤 연습에 매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며 우수 한 생도들이 검무와 승무를 공연하며 기량을 발전시켰다. 또한 1937년 경성에서 설립된 모던 기생학교에서는 입학시험을 통해 14세 이상 20세 이하의 여학생을 선발하고 보통과 3년, 본과 1년, 전수과 1년의 교육과정을 운영하며 기생을 전문적으로 양성하였다. 1940년 목단강에서 조선권번이 조직되었으며 약 50여 명의 기생이 권번 시험을 통과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이는 기생이 일정한 능력을 갖춘 전문 예술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자격 검증을 거쳐야 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러한 교육을 통해 기생들은 전통 예술을 현대적 공연 형 식으로 발전시켰으며 공연 예술가로서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통합 방식은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는 전략으로 기생학교와 권번을 통해 기생들은 체계적인 교육을 받으며 전문 예술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전통춤과 노 래를 현대적 공연 형식으로 발전시키며 예술성을 강화하였고 권번 시험을 통해 일정한 능 력을 갖춘 전문 직업인으로 인정받았다. 이처럼 기생들은 공연과 예술 활동을 통해 경제적 이윤을 창출하는 전문적인 직업군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는 전통과 현대를 조화롭게 융합하 는 통합적 적응의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될 수 있다. 통합은 개인이 전통적 자아와 현대적 요구 사이에서 상호 보완적인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이다. 기생들은 교육과 제도적 지원 을 통해 두 세계의 장점을 모두 수용하며 새로운 의미 체계를 창출하고 이를 통해 심리적 안정과 사회적 성취를 이루어냈다.
4. 주변화
주변화는 기존 문화와 새로운 문화 모두에서 소외되는 방식으로 정체성 재구성에 실패 하는 적응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문화심리학에서 의도적인 세계 내에서 의미와 자원을 충분히 획득하지 못해 심리적 고립과 정체성 붕괴를 경험하는 현상으로 설명되며 문화적 변화의 그늘에서 자신을 재구성할 수 없는 개인들이 겪는 고통과 상실감, 그리고 의미 체 계 붕괴의 결과로 이해된다. 사회적 변화 속에서 적응하지 못한 기생들이 이에 해당한다. 전통적인 기생의 역할이 점차 사라지고 근대적 직업군에도 진입하지 못한 일부 기생들은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고립을 겪으며 심리적 혼란을 경험했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문제 가 아니라 사회 구조의 변화 속에서 발생한 문화적 소외의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전통적 인 관기 제도가 해체되면서 전통적 보호망이 붕괴되고 근대적 직업군에 진입하지 못한 일 부 기생들은 경제적 불안정과 사회적 고립에 시달렸다. 이러한 심리적 소외감은 잦은 자살 시도 사례에서도 드러난다.
1916년 인천에서 활동하던 창기 조옥향(趙玉香, 22세)이 영업 부진과 빚으로 인해 생활 고에 시달리다가 결국 자살을 선택한 사례는 기생들의 경제적 몰락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매일신보』 1916. 6. 25. 3면.). 또한, 1921년 신정대승루에서 활동하던 창기 오전(奧田 스미, 21세)이 삶을 비관하여 자살을 시도했으며(『매일신보』 1921. 8. 12. 3면), 같은 해 용산 대도정가에서 활동하던 창기 김금주(金錦珠, 20세) 역시 음독을 통해 극단적인 선택 을 하려 했다(『매일신보』 1921. 12. 16. 3면). 이들은 모두 심리적 고립과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주변화된 삶을 살았던 사례다. 전통적 역할이 해체되고 새로운 대안이 마련되지 못한 상황에서 일부 기생들은 정체성을 잃고 예인이 아닌 창기라고 불리며 예인 으로서는 사회에서 배제되는 경험을 하였다. 이는 개인이 문화적 접촉 속에서 의미를 재구 성하는 데 실패할 때 발생하는 심리적 고립과 우울, 절망감으로 나타난다.
주변화는 문화심리학이 말하는 의도적인 세계에서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데 실패한 결 과로 개인이 기존 문화와 새로운 문화 모두에서 소외되어 심리적, 사회적으로 고립된 상 태를 반영한다. 이는 근대화와 사회 구조 변화 과정에서 일부 기생들이 겪은 정체성 붕괴 와 심리적 스트레스를 보여주며 문화적 의미 체계의 붕괴가 개인의 삶에 미치는 파괴적 영향을 설명한다. 즉, 기생의 주변화는 단순한 직업적 실패가 아니라 사회적 변화 속에서 적응할 기회를 상실한 결과였다.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주변화된 기생의 심리상태가 얼 마나 힘들고 외롭고 불행했을지 짐작하게 해준다. 심리적 적응 분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 2
관기의 심리적 문화변용(Psychological Cultural Transformation of Government Gisaengs). 성은미, 2025. 2. 2.
모델, 가수, 배우, 서화가 | 동화 |
사회운동, 독립운동 | 분리 |
기생조합, 기생학교, 권번 | 통합 |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자살을 하거나 소외된 형태 | 주변화 |
Ⅴ. 맺음말
본 연구는 1908년부터 1945년까지의 시기에 관기의 문화변용 적응을 문화심리학적 관 점에서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조선시대 관에 소속된 ‘예인’인 관기가 실질적인 관기제가 폐지되며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상황에서 겪은 변화를 고찰하고 이들이 사회적 역할과 정체성을 재구성하며 심리적 적응을 이루어 내는 과정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먼저, 사회문화적 적응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였다. 첫째, 교육화와 전문화. 둘째, 모델과 배우로의 전환. 셋째, 가수로의 진출. 넷째, 서화가로의 변화. 다섯째, 사회운 동과 독립운동 참여다.
조선시대 관기는 예인의 일 뿐만 아니라 의녀 및 상방 등 다른 일을 함께해야 했다. 그러 나 1908년 이후 기생학교와 권번에서 예인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을 통해 전문 직업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전문적인 예인 교육에 힘입어 직업의 확장을 가져와 모델, 배우, 가수, 서화가 등 세분화된 예인으로 전환하여 진출할 수 있었으며 사회운동과 독립운동에도 참 여하여 누구보다 솔선수범하며 사회에 본보기가 되었다.
관기의 심리적 적응에는 존 베리의 네 가지 적응 방식(동화, 분리, 통합, 주변화)을 적용 하였으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동화는 기존의 문화적 정체성을 버리고 새로운 문화에 완전히 융합하는 방식으로 모델, 가수, 배우, 서화가가 속한다. 둘째, 분리는 기존 문화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문화와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기생의 사회운동과 독립운동이 속한다. 셋째, 통합은 기존 문 화와 새로운 문화를 모두 수용하며 조화를 이루는 방식으로 기생조합, 권번, 기생학교가 여기에 속한다. 넷째, 주변화는 기존 문화와 새로운 문화 모두에서 소외되는 방식으로 어 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자살하거나 소외된 형태의 모습이 여기에 속한다.
동화, 분리, 통합은 결과적으로 관기의 직업의 전환과 시대를 앞서가는 예인으로서 정체 성을 재구성하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평가할 수 있다. 반면 주변화로 나타난 결과는 1908년 부터 1945년의 급격한 사회문화의 변화 과정에서 관기의 사회문화적응의 부정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따라서 관기의 사회문화적 적응은 단순히 변화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역할을 창출하고 정체성을 재구성하며 적극적으로 시대적 요구에 응답한 과정이었다. 심 리적 적응은 전통적 가치와 새로운 환경 간의 긴장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긍정적인 면과 함께 부정적인 부분까지 다양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사례들은 관기가 예술가로서 전통과 근대를 잇는 가교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준다. 전통과 현대를 조화롭게 결합한 관기의 사 례는 가장 성공적인 적응 방식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례에서 우리는 좀 더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본 연구는 문화심리학적 관점에서 관기의 문화변용 과정을 조명함으로써 관기의 직업 변화와 사회운동 및 독립운동 참여 등을 주목할 수 있었으며 전통과 근대의 교차점에서 나타난 관기의 사회문화적·심리적 적응 양상을 이해할 수 있다. 관기의 직업적 다각화와 사회운동 참여 사례는 단순한 문화변용을 넘어 새로운 정체성과 사회적 역할을 만들어가 는 과정으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이 연구는 다문화적 맥락에서의 적응 연구뿐만 아니 라 전통적 가치와 현대적 요구 간의 갈등을 탐구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앞 으로도 관기의 다양한 문화변용의 사례를 통해 전통 예술과 현대적 변화가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심도 있게 연구함으로써 무용과 문화예술 전반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 한다.